끌어다 쓴 건 무슨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팜므파탈이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를까?
하루를 고민하다 이제야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으로 생각을 끝낼 결심이 들었다.
지금 나에겐 2년 가까이 만난 여자친구가 있다. 그녀는 섹시하고 애교가 넘친다. 지금까지 가장 오래 만난 여인인 만큼 취향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다. 그 어느 누구보다, 심지어는 절친한 친구나 부모님보다 의지가 된다.
유혹의 시작.
하지만 그런 나에게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 찾아들었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생각치 못한 시점에 찾아들었다. 처음 만난 그녀는 내가 자주가는 피트니스 클럽의 인포데스크를 지키는 아르바이트걸 이었다. 그녀는 늘 미소를 머금고 말을 먼저 건네 주었고, 가끔 엉뚱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매력을 느낀 것은 아니다. 외모가 그리 뛰어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을 여자였다.
올해 첫 눈이 오는 날이었다. 덜덜 떨리는 몸으로 클럽에 들어서니 그 아가씨가 있었다. (그 당시 그녀의 이름은 커녕 얼굴도 기억 못하고 있었다.) "춥죠? 이거 따뜻해요." 그것은 단백질 파우더를 섞어먹는 쉐이커에 담은 따뜻한 물이었다.
'물? 마시라고 주는 건가?' 아무 생각 없이 주둥이에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첫 눈이 온다며 설레발을 치던 그녀가 나를 보며 놀라며 "그걸 마셨어요? 생각보다 야하네. 내가 그거 입 대고 마셨는데."
'웃기네. 간접 키스 뭐 이런 소리 하려는 건가? 일본 만화가 사람들 많이 버려놨다니깐.' 라고 생각하며 미안하다고 하며 옷을 갈아입으러 갔지만, 생각보다 그 기억은 내 머리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맴돌았다.
그녀에게 갑자기 관심이 간 것이다.
그런 후 다음날 바로 보기가 왠지 쑥쓰럽기도 하고 바쁘기도 해서 이틀 뒤에 클럽에 갔다. 뭔가 그때의 기억이 찜찜하게 남아 초콜렛을 하나 안겨주며 잊을 셈이었다. 그렇게 들어서니 그녀가 없었다. 실망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들어서려니 갑자기 사무실을 열고 나오며 그녀가 말했다. "나 없으니 서운했죠?" 황당함과 안도감이 다시 한번. "여기 저번 물에 대한 선물." 기뻐하며 잘도 받아먹는 그녀. 솔직히 그녀에게 이런 일이 한 두번이 아닐것이라는 건 안다. 그녀에게 이성을 느끼진 않았다. 그냥 귀여운 아이에 불과했다.
"저 금요일에 여기 그만둬요."
그녀가 그만둔다 했지만 사실상 피트니스 클럽의 회원수가 예전같지 않아 정리해고나 다름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이니 당연했다. 그러냐고 하면서 더 예쁜 인포가 오느냐고 하며 장난을 쳤다. 그러니 무반응. 뻘쭘해져서 그냥 운동이나 열심히 했다. 한참이 지났을 까, 외투를 입고 나갈 준비를 하는 그녀를 발견했다.
"어디 가는 거에요?"
"오늘부터 그만 하라네요. 그래서 가려구요."
말은 안했지만 얼굴이 만가지 상을 띄고 있었다. 착잡함과 서운함, 홀가분함이 섞인 표정. 나도 모르게.
"어떻게 그럴수가"
"할수 없죠 뭐. 사정도 안 좋은거 알고, 나도 아르바이트였으니까"
"...... 그럼 연락처라도 줄래요? 송별 파티라도 해야죠?"
갑자기 입에서 떨어진 말이었다. 솔직히 위로삼아 웃자고 한 말이었지만 그녀는 나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종이쪽지에 연락처를 적어주길래 자주 연락하겠다 웃으며 말했다.
"여자친구 없어요? 난 남자친구 있는데."
"... 있어요^^ 그러니까 아주 심심할 때만 연락하죠 뭐."
또 한참을 운동하고 나니 12시까지 운영하는 데도 11시쯤에 나갔단다.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어 씻지도 않고 그녀를 잡을 요량으로 허겁지겁 나갔다. 아뿔싸. 그녀의 전화번호를 운동복 주머니에 넣어둔 채로 탈의실 빨래통에 집어넣어 버린 것이다. 정신없이 한참 찾았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관심 없는 여자한테 이렇게 까지 해야하나?
하지만 나에겐 그런 것보다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한편으론 이렇게 연락해서 좋은 말 들을 리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을 땀내나는 빨래통을 뒤졌지만 실패하고 인포에서 트레이너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나갔다.
또 잠깐을 고민하다 전화 받았으니 예의상 전화라고 하자는 생각이 들어 전화를 했다. '이런 수상한 전화를 받겠어? 나 말고도 그런 적 많았겠지.' 하는 찰나에 전화를 받았다. 뭐라뭐라 횡설수설하면서 내일 점심 이나 먹자고 했다. 서로 임자가 있으니 술은 말고 밥이나 한번 먹자고. 흔쾌히 저녁 먹자고 해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친구 하나 생겼구나 싶었다.
첫 만남
다음 날, 대학로에서 보기로 하고 그녀를 기다렸다. 그간 문자를 몇 번 주고받았는데, 다소 수상한 말투가 마음에 걸렸다. '병원에 가서 주사 꽝 맞고 빨랑 갈께요. XX씨.' 뭔가 연인에게나 할 법한 말투를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렇게 삼십분 정도를 기다리니 그녀가 도착했다.
우리는 인도 카레집에 가서 다소 매운 카레를 먹었다. 그러고는 찻집에서 수다를 떨었다. 정말 잡다한 이야기. 그녀의 남자친구 얘기도 쉬지 않고 늘어 놓았다. 사진도 보여주며 자랑을 늘어놓는데, 잠깐이나마 그녀를 여자로 봤던 내가 바보같았다. 그녀는 다소 엉뚱한 사고방식과 덜렁거리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친구와 만난 지 3년 가까이 되었고, 그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었다. 휘트니스 클럽에서의 재수없는 트레이너 욕도 서슴없이 나왔다. 그녀가 계속 화제를 돌려가며 말한 덕분에 정신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다 술이 한잔 마시고싶어 칵테일 한잔 안하겠냐고 잠깐 물었다. 병원에 다녀와서 마시면 안된단다. 그럼에도 그녀는 나와 같이 나와 시끄러운 칵테일 쇼를 하는 곳에서 무알콜 칵테일을 마셨다. 그렇지만 너무 시끄러워 그만 나가자더니 다른 곳에서 한잔 더 하지 않겠냐는 거다.
반가웠다. 사실 이대로 돌려보내기 싫을 정도로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리저리 찾다가 와인 바를 들어갔다. 생전 처음 들른 곳이지만 와인이 마시고 싶어 기분이 좋았다. 다소 비싼 덕에 가장 싼 부류를 골라 히히덕 거리며 한잔씩 기울였다. 내가 기다리며 읽으려 했떤 장 자크 상뻬의 그림책을 읽으며 재밌는 분석을 늘어놓기도 하고, 차츰 남자친구가 많이 이해해주고 듬직하긴 하지만 너무 과묵하다는 말도 했다. 그러던 중 우리는 조금 가까이 앉게 되었고 그녀가 한 눈에 들어왔다. 술김이 어느정도 오르니 그녀는 자신의 날씬함을 은근히 어필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귀여워 보였고, 허리는 그녀의 말처럼 날씬 했다. (내 여자친구가 가지지 못한 허리이다.)
새벽 한시가 넘으니 나와야 했다.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잠깐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이렇게 바람을 비우면서 내 여자친구를 포기할 만한 여자가 아니란 생각이 잠깐 들었다.(결코 양다리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머뭇거리고 있으니 그 여자는 어디 갈까요라며 물었다. (새벽 한시에 모든 술집이 문을 닫고 있는 시점에 그런 질문은 뻔한 것이었지만)사심없이 술을 더 마시자는 말이라 생각하고.
"술이나 한 잔 더 마실까요?"
"술은 됐구요."
"......"
"그만 갈게요. 택시 잡아줘요."
그것으로 그녀의 마음은 결정된 듯 했다. 사실 그땐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 지 몰랐다. 나중에 그녀는 나와 같이 밤을 보내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그녀 앞에서 정말 친구에게나 할 법한 말을 꺼내 놓은 것이다. 밤길이 위험하다 핑계를 대고 택시에 같이 탔다. 겉으론 그녀를 데려다 주겠다는 속셈이었지만 그녀가 조금이라도 다시 한번 기회를 주면 행선지를 돌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금 택시 밖에서의 대화로 자존심을 구긴 여자는 내 쪽은 쳐다 보지도 않았다. 즐거웠다며 냉정하게 돌아서는 그녀를 잡을 용기는 없었다. 집 앞에 데려다 주며 택시로 돌아오는 길은 뭔가 불안감으로 가득 찼다. 혹시나 싶어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러보기도 했지만 이미 꺼 놓은 상태였다.
버스는 이미 지나갔다. 그 다음엔..
부담없는 친구로 보내고 싶었던 것은 나 뿐이었나 보다. 그녀는 철저히 연락을 끊고 사라져 버렸다. 나 역시 더 이상의 미련을 남기지 않기 위해 전화번호를 지웠다. 만 하루가 지난 지금 그녀의 얼굴도 잘 기억 안날 정도가 되었다. 그렇지만 혼자 방에 틀어박혀서 그녀의 속살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잘록한 허리와 작은 얼굴, 새하얀 속살이 보이던 팔뚝을 떠오르며 마스터베이션을 했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가 왜 능숙하게 손을 잡아주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로맨스였다. 바람이래도 상관 없다. 그녀는 생각보다 나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날 이후, 여자친구에 대한 맹목적 동경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에 대한 미련이 생겼다. 편안함에 안주하고 따뜻하게 여겼던 내가 또 다른 여자를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변화였다. 그녀와 아무 일이 없었는데도 나는 그녀와 소통했다. 단 하루만에 그녀는 나와 잠자리를 같이하길 원했다. 이게 가능한 일이었다니. 유혹은 그렇게 간단하고도 강렬하게 찾아왔다. 다른 여자에 대한 관심이 자꾸 든다. 성격이 어떻게 취향이 어떻고 하던 과거의 착한 남자는 사라지고 원초적인 본능이 펄떡거린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이다. 사실 지금 좀 두렵다. 오후엔 여자친구와 만나기로 했고, 우리는 작은 연극을 하기로 했다. 서로를 처음 본 셈 치고 다른 사람을 사칭하자는 놀이를 그녀에게 제안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했을까? 속내를 들킬까봐 겁내던 것이 아닌가? 진실을 토로해 버리면 그녀는 감당할 수 있을까? 얼마전 그녀가 다른 남자에게 흔들린 것처럼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모든 건 오늘 저녁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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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YA 2007/11/24 20:21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글을 읽다 보니, 저랑 비슷한 성격이신 것 같네요. 여친 분에게는 말씀하지 마세요.
결론은 마음만 잠시 뺏겼을 뿐인데, 여친께서 아시면 평생 자신의 남친을 뺏긴 기분일 거예요.
파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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