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큰스님이 기거하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절에는 고양이도 한 마리가 있었는데, 유독 큰스님이 염불을 외는 시간이면 꼭 울었다. 이 울음소리가 큰스님의 수양에 방해가 되는지라 항상 큰스님이 염불을 외는 시간이 가까워지면 사찰의 스님들은 고양이를 사찰 입구 나무에 묶어두었다고 한다.
어느덧 시간이 오래지나 큰스님도 입적을 하고, 울던 그 고양이도 죽고 난 뒤가 되었다. 사찰은 큰스님의 명성 덕분에 큰절이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항상 스님들이 염불을 욀 시간이 되면, 주변에서 고양이를 필사적으로 찾아서 나무에 묶는 것이 전통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심지어 고양이를 찾지 못하면 스님들이 수양도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는데, 문제는 누구도 그런 전통이 왜 생겨났는지는 모른 채 전통이기에 꼭 지키는 이들만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그 사찰에서 고양이를 묶는 것이 습관 정도로 머무르지 않고, 전통의 권위에 기대어 그 일을 하는 이가 특별한 지위를 얻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그에게는 “왜?”라는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불편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라고 역사를 들추는 것은 그에게는 단지 합리적인 사고를 넘어서 자신의 지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이어질 일이기 때문이다. 한스 큉은 ⌜가톨릭교회⌟ 2장을 통해 마치 사찰에서 고양이를 잡던 그날의 이유를 묻듯, 교회의 전통에 대해 “왜?”라는 질문을 한다.
2장은 바오로의 전도활동으로 시작을 한다. 이 시기 ‘그리스도인’은 팔레스타인의 농촌 환경에서 시작한 예수 운동이 도시현상으로 탈바꿈하면서, 동시에 헬레니즘 문명과의 ‘문화 접변’을 이루는 과정 속에 놓여있다. 그 중심에는 바오로가 있었다.
한스 큉은 바오로가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바오로는 그리스도교를 새롭게 창시하지 않았고, 다만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신앙의 정수’를 물려받아 이방인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전달하기를 희망했다. 그는 유대교를 전복하려는 의도를 가지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유대교의 율법과 같은 전통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한스 큉은 바오로의 이러한 선교태도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의미는 살리면서도, 유대교 안에 갇히지 않고 세계 종교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고 있다.
이런 바오로가 세운 교회들의 제도에 대해서 한스 큉은, 현재의 감독제도보다는 회중제와 가까운 교회이었음을 이야기한다. 바오로의 교회는 모인 신자들의 자유로운 능력에 따라서 목회가 이루어진 교회들이었다. 그에 속한 신자들에게 부여된 능력들은 교회의 권위가 지정한 능력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독특한 성령의 은사, 공동체를 위한 자신의 특별한 은사였다. 바오로는 교회의 설교, 구제, 공동체 지도자 등의 여러 기능들에 대해서 ‘모두 중요함’을 강조하였으며, 그중에서 지금의 성직자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지도력의 은사’는 맨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해당된다.(로마 12:6-8) 바오로는 교회 안에서의 여성들의 역할도 남성들 못지않게 중요하게 언급하고 있다. 바오로는 성만찬도 사제가 집전해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한스 큉은 ‘디다케’를 통해서도 ‘감독과 집사 이전의 성만찬’을 볼 수 있듯, 초기 교회에서 지금과 같은 교회계급 구조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바오로의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의 ‘성직자’, ‘평신도’의 구분은 예수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이 아니라, 초창기에 ‘발생’한 제도이다. 바오로의 선교시대 당시 감독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들 모두가 ‘사도 전승’의 반열에 오른 이들이다. 그들 모두를 사도로서 인정한다면, 그들 나름의 다양한 목회방식도 당연한 것이 된다. 다만, 바오로의 죽음 이후 필요성 때문에 교회제도를 정비한 것이다. 이런 정비는 처음에는 도시에서부터 시작되어 그 뒤에 전 교회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110년경에 이르러서 이그나티우스 감독은 감독, 장로, 집사의 교회 직제를 선보인다. 하지만 한스 큉은 ⌜그리스도교⌟를 통해 이 시점에서도 이런 직제구분은 아직 희망사항이었음을 지적한다. 이런 교도권의 노력들이 더해지면서 역사적으로 직제가 도입되고, 감독 없이는 성만찬을 시행할 수 없게 되는 것이 당연해졌다. 하지만 한스 큉은, 이 시기에도 전체교회의 수장으로서 로마감독의 지위는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다.
이런 직제구분은 어떤 변종은 아니었다. 오히려 목회에 있어 크게 유용했다고 한스 큉은 강조한다. 직제의 효율성은 그리스도교의 확장과 함께 흐트러지기 쉬운 교회 정체성의 연속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한스 큉은 복음 정신에 의거하여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고 사제 권력의 우상화,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지 말아야 함을 지적한다.
그리스도교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초대 교회의 지도자 역할을 했던 예루살렘 교회의 붕괴와 함께 유대계-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작은 종파로 전락한다. 거기에 더해 유대계-그리스도교는 아예 이단이라고 낙인찍히기까지 한다. 한스 큉은 이 과정에서 그들의 오래된 신조와 삶의 모습은 왜곡되고 마니교와 이슬람 등에 흡수되어 사라졌음을 슬픈 일이라고 안타까워한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로마는 예루살렘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교의 중심이며 주도적인 교회가 된다. 전례 의식에서도 아람어, 히브리어 대신 그리스어가 주로 사용되는 시기가 이 시기이다. 중세와 근대까지도 전통적이며 공식적인 가톨릭 언어였던 라틴어의 사용은 4세기 중반이 되어서야 결정적으로 확립된다.
초기 교회의 확장은 로마 당국의 박해와 더불어 진행된다. 네로 황제의 만행 이후, 그리스도교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저주받고 처형당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유일신 신앙은 황제와 국가를 신으로 선언하는 로마 안에서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다만 이 시기의 박해는 체계적이거나 연속적이지 않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성만찬을 자기들의 집에서 시행할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순교할 준비를 의미했다. 한스 큉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감내했으나 애써 추구하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박해에도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의 숫자는 놀랍게도 증가한다. 그리고 박해는 신학의 발전을 이끄는 동기가 되었다. 이 박해 기간 동안, 그리스도교를 공개적으로 ‘변명’해야 했던 ‘사도 전승 교부들’은 교회 내외에 여러 가지 오해들에 대한 글을 써야했으며 심지어 황제에게 보내는 변호의 글이 요구되기도 했다. 한스 큉은 이 글들이 정치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못했지만, 교회 내부에서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고 판단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성경 안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을 넘어서 헬라적인 개념을 이용하여 철학적인 논증을 전개했고, 이런 논증들이 그리스도교 신앙 형성에 아직도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변증가들’ 중에서, 한스 큉은, 유스티누스가 헬라 사상과 신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이방 종교들의 다신론과 여러 추악한 문제들이 미신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악마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논할 줄 알았던 논증가였다고 평한다. 유스티누스는 헤라클리투스,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들이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교야말로 진정한 철학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철학과 신학을 통합하면서 주장한 것은, 신적인 ‘로고스’로서 ‘진리의 말씀’은 ‘진리의 씨앗’으로 모든 사람에게 심어졌고, 예언자와 철학자들에게 나타났다가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형태를 취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오리게네스에게 이어져, 인류 역사 전체를 계속해서 하느님 자신에게 이끄는 ‘교수법’으로 이해하도록 하였다. 그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유대교적 묵시문학 패러다임과는 달리,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로고스와 성자의 성육신 및 선재로 강조점이 바뀌는, 당시의 그리스도교 사고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변화의 부정적인 결과로, 한스 큉은, 그리스도교가 본래의 실행적, 실천적인 진리관에서 그리스 사상처럼 이론적, 사색적으로 변한 것을 꼽는다. 이런 헬라적 그리스도교에서는 실천적인 그리스도의 제자 됨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세계 등에 대한 계시된 가르침을 수용하는 것에 관심이 더 많아진다. 이는 신앙의 올바름 즉, 무엇이 ‘정통’ 교리인가에 대한 논쟁이 더 많이 벌어지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가톨릭’이라는 단어 역시 중립적 용어에서 ‘정통신앙’을 가졌다는 논쟁의 어감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런 논쟁의 중심에는 영지주의가 있었다. 영지주의는, 세상의 악의 기원을 알게 하여 구원을 이루는 지식이 소수의 영적인 엘리트에게 내려 구원을 이룬다는 종교 운동이었다.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큰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이는 혼합주의 등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서 이후의 신학자들은 교회의 단순한 믿음을 옹호하는 논쟁을 펼친다. 이에 더 나가 가톨릭 교회는 타협을 거부하고 그리스도교적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확실한 기준을 명시함에 이른다. 정통 교리의 확립, 정경 제정, 감독직제의 수립, 세 가지가 그것이다.
한스 큉은, 이중 성직계급 구조의 확립이 특히 여성들의 진정한 해방에 걸림돌이 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리스도교 교부들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 모두의 동등함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동기에 고대 후기 사회의 성에 대한 증오심이 그리스도교에 깊은 영향을 주어 여성들이 교육에서 차별받은 모순을 가져왔다. 이는 특히 종교 영역에서 남성 지배를 공고하게 만든다. 한스 큉은 수많은 신학자와 감독들이 여성의 열등함을 역설하고, 초재 교회가 허용하고 희망했던 것과 정반대로 교회에서 여자들의 직무를 박탈하고자 했음을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지금까지도 유효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세계교회로의 성장은 부정적인 면만을 지니고 있음은 아니라고 한스 큉은 이야기한다. 이는 헨리 채드윅의 ‘기독교의 역설’을 인용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이 시기의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방종교와는 달리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지속적으로 유대감을 가지고 돕는 것이 매일매일의 도덕이 되는 ‘밑에서부터의 사랑’의 실천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실천은 노예제도 등의 정치적인 권력구도의 변혁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가 성공한 이유가 되었다.
한스 큉은 2장을 통해 직제구분, 헬라적 교리 등의 ‘전통’들은 그리스도교 자체의 것은 아니며, 단지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여성배척과 사변적인 교의들은 복음과 거리가 멀어진 ‘고양이 묶어두기’임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선교에서 역사적으로 적절하게 대응한 바오로 등의 선교 태도와 일상에서의 실천과 같은 그리스도교의 장점에 대해서는 잊지 않도록 촉구하고 있다.
한스 큉은, 현재의 우리에게 지금의 여러 교회전통들이 “복음 정신에 의거하여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지 묻고, 이가 혹시 소수의 “권력을 우상화하거나 유지시키기 위해 이용되지 않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2장의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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